솔직히 저는 넷플릭스 신작 공개 소식을 들어도 예고편 한 번 보고 넘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리고는 달랐습니다. '저주'라는 소재를 스마트폰으로 풀어낸다는 설정을 접하는 순간, 제가 어릴 때 드라마에서 봤던 궁중 여인들의 인형 칼침 장면이 떠오르며 묘하게 손이 멈췄습니다. 저주라는 감정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새삼 실감했습니다.

저주 소재, 스마트폰 매개체로 재해석하다
저주(詛呪)란 특정 대상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찾아오도록 빌고 바라는 주술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상대방에게 나쁜 일이 생기길 간절히 원하는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개념은 조선시대 궁중 드라마에서 인형에 바늘을 꽂는 장면으로 자주 등장했는데, 일반적으로 저주란 먼 옛날의 미신적 풍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마음속으로 정말 미운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기리고는 이 오래된 감정을 스마트폰이라는 현대적 매개체(媒介體)에 담아냈습니다. 여기서 매개체란 어떤 현상이나 감정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도록 이어주는 중간 수단을 뜻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인형이나 부적이 그 역할을 했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누구나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사는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제가 직접 예고편을 봤을 때 이 설정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익숙한 물건이 갑자기 섬뜩한 도구로 변환되는 순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 드라마가 민속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은, 저주가 단순히 피해자에게 끝나지 않는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민속·무속(巫俗) 맥락에서 저주는 반드시 특정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매개체를 통해 다음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무속이란 무당이나 주술사가 신령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민간 신앙 체계를 말합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가 느낀 감정이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저주가 끝났을까'가 아니라 '이제 어디로 옮겨간 걸까'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떠올랐습니다.
기리고의 저주 소재가 갖는 핵심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저주라는 전통적 민간 신앙 개념을 현대 배경에 이식
- 스마트폰을 저주의 전파 매개체로 활용해 친숙함과 공포를 동시에 자극
- 저주의 종결이 아닌 전이(轉移)에 초점을 맞춰 열린 결말 구조 설계
한국 민속 신앙에 대한 학술적 기록을 살펴보면, 저주와 같은 주술적 행위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는 문화적 기제로 해석된다고 합니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제 경험상 이런 맥락을 알고 드라마를 보면 단순한 공포물이 아닌 사회적 드라마로 읽히게 됩니다.
인물 관계도, 선악 구분 없는 캐릭터가 만드는 긴장감
기리고의 또 다른 강점은 인물 관계도(關係圖)에 있습니다. 여기서 인물 관계도란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서로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를 구조적으로 보여주는 서사 설계를 뜻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선인과 악인으로 나뉘지 않습니다. 각자가 저마다의 상처와 동기를 가지고 있고, 그 동기가 충돌하면서 사건이 전개됩니다. 특히 친구 사이에서 저주가 벌어진다는 설정이 제게는 가장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낯선 적이 아닌 가까운 사람이 나를 해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심리적 서스펜스(suspense)를 만들어냅니다. 서스펜스란 결말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청자가 느끼는 심리적 긴장과 불안 상태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공포물에서는 외부의 위협이 긴장감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리고는 내부 관계에서 공포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접근 방식이 다릅니다. 캐릭터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시청자의 서사적 몰입도(沒入度)를 높이는 핵심 장치입니다. 몰입도란 시청자가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 경험처럼 느끼며 감정적으로 개입하는 정도를 말합니다. 어떤 인물도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선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런 구조는 시청자가 특정 인물을 응원하다가도 다음 장면에서 입장이 흔들리는 경험을 반복하게 만듭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주물이라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국내 OTT 콘텐츠 소비 패턴 연구에 따르면,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재시청 의향을 갖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은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 설계와 예측 불가능한 전개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기리고는 이 두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단회 시청으로 끝나지 않을 드라마라는 예감이 듭니다. 기리고에서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저주가 어디서 시작됐는가가 아닙니다. 저주를 행한 인물이 끝까지 그 선택을 후회하는가, 아니면 정당화하는가입니다. 저주라는 감정을 품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