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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눈을 못 마주치는 게 단점일까요, 아니면 그게 오히려 진심의 증거일 수도 있을까요. 2025년 10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8부작 시리즈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그 질문을 초콜릿처럼 천천히 녹여내는 드라마입니다. 오구리 슌과 한효주가 주연을 맡았고, 프랑스 영화 《Les Émotifs Anonymes》를 원작으로 합니다. 제가 직접 끝까지 본 솔직한 후기를 씁니다.
두 주인공 설정, 만화 같은데 왜 공감이 됐을까
처음 두 주인공의 설정을 들었을 때 솔직히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눈 마주침이 어렵고, 다른 한 사람은 신체 접촉이 힘든데,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만은 예외가 된다는 구조니까요.
그런데 막상 보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건 사회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의 특정 양상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한 설정에 가깝습니다. 사회불안장애란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으로 일상적인 상호작용조차 힘들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증상은 특정 환경이나 특정 사람 앞에서는 완화되기도 합니다. 드라마가 그 지점을 로맨스 언어로 풀어낸 것이라고 보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저도 아이 학교 학부모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 이미 서로 친한 무리 사이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으며 앉아 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꺼내는 데 드는 에너지가 생각보다 컸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아이도 1학년이죠?"라고 먼저 말을 걸어준 한 엄마 덕분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와 소스케가 서로에게 조금씩 말문을 트는 과정이 그래서인지 유독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 방식은 원작인 프랑스 영화의 정서적 뼈대를 유지하면서도, 한일 합작이라는 형식에 맞게 감정 표현 방식을 좀 더 절제된 방향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콜릿 장면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이유
이 드라마에서 초콜릿은 분위기 소품이 아닙니다. 하나라는 인물 자체가 쇼콜라티에(Chocolatier), 즉 초콜릿 전문 제과인이고, 그녀가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이 두 사람의 감정 흐름과 직접 연결됩니다.
쇼콜라티에란 단순히 초콜릿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카카오 원료의 품질부터 템퍼링(Tempering) 온도 조절까지 전 공정을 설계하는 제과 전문가를 의미합니다. 템퍼링이란 초콜릿을 녹였다 굳히는 과정에서 온도를 정밀하게 조절해 광택과 질감을 완성하는 기술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하나가 초콜릿을 다루는 장면들은 이 공정을 꽤 충실하게 담아냈는데, 덕분에 단순히 예쁜 화면 이상의 밀도가 생겼습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이 구조적으로 닮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둘 다 온도에 민감하고, 서두르면 망가지고, 정확한 타이밍을 기다려야 완성됩니다.
드라마의 시각적 연출도 이 흐름과 잘 맞았습니다. 갈색 계열의 따뜻한 색온도, 조용한 작업실 분위기, 말보다 행동으로 감정을 전하는 한효주의 표정 연기가 초콜릿 장면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습니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여기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 카카오 원료 선별부터 완성까지의 공정을 충실하게 시각화
- 템퍼링 과정이 두 사람의 감정 속도와 은유적으로 연결
- 따뜻한 색감 연출이 전체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지
- 한효주의 절제된 표정 연기와 장면의 온도가 일치
느린 전개가 장점인가, 단점인가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이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언제 가까워지는 거지, 라는 답답함이 중반부에 분명히 있었습니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는 기법인 감정 지연(Emotional Delay)은 시청자의 기대감을 높이는 도구입니다. 감정 지연이란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시청자는 알고 있는데, 정작 두 사람은 표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상황을 오래 끌어 긴장감을 유지하는 구성 방식입니다. 이 드라마는 그 기법을 8부작 전체에 걸쳐 매우 천천히 사용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는 구간에서는 편집 리듬이 조금 늘어지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느림이 두 캐릭터의 심리 상태와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을 가진 사람이 감정을 표현하는 속도는 실제로 이만큼 느릴 수 있으니까요.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감정 표현 지연이 길어지고 자기 개방(Self-disclosure) 수준도 낮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개방이란 자신의 생각·감정·경험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행동을 뜻합니다. 드라마가 이 부분을 의도적으로 반영했다면, 느린 전개는 결함이 아니라 설계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설계가 모든 시청자에게 통하는 건 아닙니다. 빠른 전개를 선호하는 분이라면 3~4화 구간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저는 초반의 답답함을 넘기고 나서야 두 사람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 변화가 미세해서 오히려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2025년 10월 16일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8부작 시리즈입니다. 넷플릭스 구독 계정이 있다면 별도 추가 결제 없이 시청할 수 있습니다.
Q. 원작 영화 《Les Émotifs Anonymes》를 먼저 봐야 하나요?
A. 원작을 보지 않아도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없습니다. 두 주인공의 기본 설정과 초콜릿이라는 소재는 원작에서 가져왔지만, 한일 합작 드라마로 재해석되면서 감정 표현 방식과 전개 구조는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Q. 오구리 슌과 한효주의 언어 차이가 드라마 몰입을 방해하지 않나요?
A. 제가 직접 봤을 때 생각보다 자연스러웠습니다. 두 캐릭터 모두 말보다 행동과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이 많아서, 언어 차이가 오히려 두 인물의 서툰 소통 방식과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Q. 로맨스 강도는 어느 정도인가요?
A. 자극적인 장면은 없습니다. 설렘보다는 따뜻함에 가까운 드라마입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연애 서사를 기대한다면 아쉬울 수 있고, 조용하고 감정적인 힐링 드라마를 찾는다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결론
《로맨틱 어나니머스》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이 사람을 단번에 바꾸는 게 아니라,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옆에서 기다려주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 경우엔 학부모 모임에서 먼저 말을 걸어준 그 한마디가 그랬습니다. 상대방이 저를 바꾼 게 아니라, 제가 말을 꺼낼 수 있는 환경을 잠깐 만들어줬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관계가 시작됐습니다. 드라마 속 하나와 소스케가 서로에게 한 것도 결국 그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빠른 전개와 강한 갈등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솔직히 조금 심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조용한 힐링 드라마를 찾고 있거나, 오구리 슌과 한효주의 조합이 궁금했던 분이라면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입니다. 처음 두 화가 조금 느리게 느껴지더라도, 그냥 초콜릿이 굳기를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보시면 맞을 것 같습니다.